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6세 (문단 편집) === 가정적인 남편 ===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이후, 그때까지의 [[프랑스 왕국]] 국왕들의 관례와는 달리 애인을 들이지 않고 아내하고만 금슬 좋게 살았다. 결혼하고 나서 왕위에 올라서도 7년 동안이나 부부관계가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 무수한 소문[* [[고자]]라거나,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역대 [[부르봉 왕조]]의 왕들 가운데 아이를 갖지 못하면 이런 소문이 자주 돌았는데,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자 이와 같은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그의 왕비 안 도트리슈가 루이 14세를 낳고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안 도트리슈가 [[리슐리외|리슐리외 추기경]]과 외도해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이 돌았다. 이런 소문에 걱정한 루이 15세가 자신이 직접 저명한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했던 [[기록]]이 나중에 공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당시 [[스페인]] 대사의 보고에서도 성적 불구는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즉, 결혼 초기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이 부부관계를 피했기 때문이다.[* 성교육이 안 돼서 성관계를 할 줄 몰랐다는 말이 인터넷에 간혹 돌기도 하는데 후사 생산이 의무였던 당시 왕족들은 성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았다. 특히나 손이 귀한 프랑스 왕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동침에 실패한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마리아 테레지아|모후]]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즉위하고 난 뒤에도 이 소문을 걱정한 [[요제프 2세]]가 여동생과 루이 16세를 만나러 직접 프랑스로 온 적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다산하여 2남 2녀를 보았다. 단 장남과 차녀는 일찍 죽었다. 차남 [[루이 17세]]는 혁명 시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대받다시피 하다 요절했고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마리 테레즈]]만이 평탄한 인생은 못 살았어도 천수를 누렸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아름다운 [[애인]]을 탐닉하고 무수한 여자들을 농락하길 즐기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 비교해보면 루이 16세의 성생활은 대단히 '''왕 답지 못한''' 것이라,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성적인 능력을 의심하는 루머가 많이 퍼져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남자가 마초적인 성향이 짙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그러한 기질이 더욱 심했다. 심지어 루이 15세가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을 때 전쟁터에서 여자와 뒹굴다 병들었을 때도 백성들이 왕에게 빨리 나으시라고 기도하여 인기가 올라갔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루이 16세의 성향은 국민들에게 비호감을 살 만했다. 그리고 이는 국민들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으며 마침 마리 앙투아네트는 조용히 안방 내조만 하던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들과는 달리 대단히 활동적이었고 각종 연회, 무도회 등의 사교계 행사를 직접 주최하고 전면에 나서길 좋아했다. 그리고 이 점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루머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도 되었다. 본래 이런 사교계 행사의 주최는 왕의 정부가 맡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이 연회를 보고 백성들이 가지는 반감 또한 정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정부를 두지 않았으니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행사 주최를 맡아야 했다. 즉 앙투아네트 본인이 이런 행사를 맡는 걸 즐기지 않았다고 해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상황인데 앙투아네트가 이 주최 자체를 매우 즐기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반감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집중된 것. 궁중에서 아예 이런 행사들을 하지 않았다면 재정도 아끼고 반감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당시 궁정 사회에서 이런 행사는 높으신 분들이 모여서 비공식적인 회담을 나누는 중요한 정치 행사의 성격도 있어서 그만두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행사 자체를 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사치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고 당대 평균 수준이거나 오히려 조금 더 검소하게 치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행사 자체로 인한 여론의 반감 문제는 둘째치고, 당시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왕실에서 약간 검소하게 돈을 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직접 프랑스에까지 온 큰처남 [[요제프 2세]]의 특훈을 받아가며 결혼 7년 만에야 부부 관계를 제대로 갖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한 앙투아네트는 결혼 8년 만에 첫 딸을 출산했다. 앙투아네트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데다 공교롭게도 첫 임신 무렵에 [[한스 악셀 폰 페르센|페르센]] 백작을 알게 됐기에 항간에는 공주의 생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루이는 첫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듬뿍 주며 소문을 불식시켰다. 뿐만 아니라 난산을 겪은 아내에게 "자연 속에서 편히 쉬어라"라는 뜻으로 별장인 쁘띠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했다고 한다. 물론 신혼 때 앙투아네트는 사내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남편 때문에 답답해하며 친정으로 보내는 편지에도 그 부분을 언급했지만 딱히 큰 불화는 빚어지지 않았고, 전술했듯 부부관계가 제대로 시작되고 나서 아이들이 연달아 넷이나 태어나며[* 출산은 네 차례 이뤄졌으나 임신은 다섯 번 했다. 첫 딸을 낳고 한 두 번째 임신은 마차 문을 닫는 과정에서 문에 배를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 됐다고 한다.]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예절 교육을 시킨 아내와는 달리, 아이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따랐다고 하며 이렇게 자녀들에게 다정했던 것은 루이의 조부인 [[루이 15세]]나 5대조인 [[루이 14세]]도 보여준 면모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